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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을 넘는 국내 다크투어리즘-1. 한국전쟁의 아픔. 노근리
    여행기 및 여행꿀팁 2020. 1. 6. 21:04
    위시빈 여행작가 0안디바0님의 여행기 및 여행꿀팁입니다.

    노근리 쌍굴다리의 아픔


    다크투어리즘은 우리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의미있는 여행입니다.

    최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소개된 다크투어리즘은 4.3민중항쟁, 거제포로수용소, 서대문형무소 등이 있는데요. 이외에도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거나, 알려졌지만 여전히 우리가 잘모르는 장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일제 침략에 이어 극렬한 이념대립과 한국전쟁까지 겪어 왔습니다. 그만큼 아픔이 많다는 뜻도 됩니다.

    우리가 잘 몰랐던 근현대사의 아픔이 새겨져 있는 곳을 찾아 떠납니다. 그 첫번째 발걸음으로 노근리 사건현장으로 향했습니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피난을 가던 주민 300여명이 미군의 직접적 기관총 사격과 폭격 등으로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생존자였던 한분의 끈질긴 노력으로 인해 밝혔졌습니다. 이 분의 노력으로 미국 AP통신이 99년 '미군이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명령에 따라 사살했다'는 보도를 전세계 특종으로 보도했고, 이는 미군의 명령원문과 당시 참전미군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피난민들이 숨었던 속칭 쌍굴다리는 총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노근리평화공원은 아픔을 기억하며 우리 후손들에게 전쟁의 아픔을 잊지마라며,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경남지역에서 2시간 거리. 서울에서도 2~3시간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여행국가: SOUTH KOREA
    여행일: 1일


    #노근리평화공원

    노근리의 역사를 기록한 평화공원
    1950년 7월. 전쟁이 터졌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농민들은 미군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시켜준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남쪽으로 떠납니다.
    피난민은 약 300여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은 옷가지 등을 싼 짐을 어깨에 메고, 발이 아프다며 칭얼대는 아이를 안고 무작정 걷고 또 걸었습니다.
    하지만 피난길을 힘들게 한 것은 짐도, 육체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공포였습니다.
    7월 25일 첫 총성이 울립니다. 당시 희생자의 증언에 따르면 '미군이 안내해주는 길을 따라 걸어갔지만 내려가는 것이 늦어지니까 미군이 피난민을 총으로 쏘았습니다. 아이 1명이 죽었습니다'
    피난민들은 공포에 떨며 노숙을 했으며 일어나 다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1950년 7월 26일. 노숙을 한 피난민들은 미군에 의해 짐 수색을 당하고, 길이 아닌 경부선 철길로 올라갈 것을 명령받습니다. 당시 짐 수색에서 미군은 남자들의 옷도 벗겨 볼 정도로 철저하게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짐수색이 끝난 피난민들에게 곧 악마가 덮칩니다. 피난민들이 철길에 오르자 전투기가 저공비행을 하며 이들을 확인했고, 곧이어 되돌아 온 전투기가 폭격과 기총사격으로 피난민들을 살해하기 시작합니다.
    혼비백산한 피난민들은 경부선 철길 아래에 있던 쌍굴다리로 숨어 들었습니다.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피난민들은 몸을 최대한 낮춰 보았지만 10M도 채 안되는 쌍굴다리는 이들을 숨겨주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쌍굴다리 맞은편에 위치한 기관총이 불을 뿜었고, 전쟁과 무관했던 무수한 이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습니다. 밤이되자 걸을 수 있는 이들은 야밤을 틈타 굴다리를 빠져나가는데 성공했지만 수많은 아녀자와 어린아이들은 빠져나가지 못 했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어린 갓난아이가 계속 울자, 울음 소리때문에 기관총 사격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 우려한 아이의 아버지가 스스로 아이의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었다는 기막히고, 숨막히는 역사에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1950년 7월 29일. 기관총 사격은 밤낮으로 계속됩니다. 미군들이 철수하던 29일 새벽에 미군은 차량의 서치라이트를 이용해 굴안을 비추면서 조준사격을 가했습니다. 당시 미군 참전군이었던 '데일리'는 "살아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매우 놀랐다"고 증언할 정도로 26일부터 29일까지의 사격은 일방적이었습니다.
    노근리사건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약 300여명의 희생자가 있으며, 확인된 사망자만 135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실 노근리 사건은 1960년대 자녀을 잃은 정은용씨가 처음으로 미군이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당시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본 이들이 진정을 넣던 곳)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구하며 세상에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진정은 기각되었고,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999년 미국의 AP통신을 통해 전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취재당시 미군명령원문문이 밝혀졌으며, 미군명령원문에는 '피난민을 적으로 대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AP통신의 보도는 전쟁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졌습니다. 아무런 잘못없이 학살된 역사를 마주한 이들은 충격에 빠졌고, 많은 이들이 진상규명에 나섰습니다.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2004년 노근리사건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였고, 지금의 노근리 평화공원이 조성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픔을 담은 노근리평화공원은 기록관과 공원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날 참전한 미군은 이야기합니다.
    "저는 아이들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총을 쏘라고 지시하는 상관에서 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권총을 꺼내들고 전쟁 중에 상관에게 항명하는 것이냐라며 너를 처형하겠다고 총부리를 향했습니다. 저는 알겠습니다라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도한 워싱턴포스티지는 War Remeberance에서는 당시 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피난민을 미국전선을 통과시키지 못하게 결심을 한 Chandler는 Daily에게 암거의 동쪽 위치에다 기관총 초소를 구축하도록 명령하였다. 다른 병사들은 철로의 서쪽에 위치한 언덕에 배치되었다. 각자의 위치는 사격시 일렬로 사격할 수 있는 각도로 편성되었으며 이는 미군병사들이 서로를 향해 사격하지 않도록 만들어 졌다. “그 누구도 나오지 못하게 하라.” Chandler는 소리쳤다. “만약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발사하라”
    어둠이 깔리자 Chandler는 암거쪽에서 3~4발의 총소리를 들었다. 그는 마치 총구에서 나오는 섬광 같은 불빛을 보았고 이는 마치 터널 안에서 누군가 발사한 것 같았다. 몇 분후 중대 연락병인 Harold Skagg는 미군 병사들이 지휘소를 구축한 곳으로 철로위로 기어왔다. “우리는 그들 모두를 사살했어요” 헐떡거리면 말했다. “꼭 아이들과 여자들도 사살해야 합니까?” 놀란 Daily는 물어 보았다. “모두 사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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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근리 평화공원 내 기록관입니다. 피난민들을 막아선 미군의 모습입니다.
    희생자들의 증언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 당시 25세에 아들과 딸이 사망했다니 아들과 딸의 나이가 짐작이 갑니다. 이들과 전쟁은 무슨 연관이 있었을까요.
    쌍굴다리를 형상화 한 곳입니다. 어두운 곳을 지날 때 그때의 공포가 잠시나마 느껴지기도 합니다.
    노근리 사건을 보도한 AP통신의 기사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AP통신은 1년간 취재 끝에 이를 보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기록관을 나와 노근리평화공원으로 향합니다.
    평화공원은 아직 봄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꽃피는 봄이 오면 여러가지 꽃이 만발해 있을 것 같습니다.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면서도 평화를 보여주는 곳이 노근리 평화공원인 것 같습니다.
    여기를 찾게되면 기록관에서 노근리사건에 대해 알아가고, 함께 온 이들과 공원을 산책하며 전쟁범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노근리평화공원 더 알아보기

    #쌍굴다리

    그날의 총탄이 남아있는 쌍굴다리
    쌍굴다리는 노근리평화공원 길건너편에 있습니다.
    그때의 총탄자국과 노근리 사건 현장임을 알리는 입간판은 서 있지만 피난민을 향해 폭격이 가해진 철길은 여전히 기차가 다니고, 학살의 현장이 쌍굴다리는 도로가 되어 차가 다니고 있었습니다. 총탄의 기록도, 입간판도 없었다면 어느 누구도 이 곳이 학살현장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크투어는 이처럼 역사의 아픔을 찾아가기도 하지만 우리의 아픔이 새겨진 역사를 잊혀지지 않게 하기위한 노력이기도 합니다.
    기차는 달리고, 차도 지나다닙니다. 하지만 이 곳은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동그랗게 표시된 모든 곳이 총탄의 자국입니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총탄자국이 선명합니다.
    쌍굴다리를 건너 산을 향하는 데크를 따라 올라가면 노근리사건희생자유족회가 희생자의 시신을 발굴하고 조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 땅에 평화가 가득해 이런 아픔이 없기를 바라며 산을 내려옵니다.
    쌍굴다리 더 알아보기

    #전체 여행기 보기(여행지도, 비용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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