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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박 10일 스페인
    여행기 및 여행꿀팁 2020. 1. 29. 03:11
    위시빈 여행작가 Wan Sick Park님의 여행기 및 여행꿀팁입니다.

    어머니 근속 30주년을 기념한 아들들과의 여행


    3인 가족 사용비용은 비행기 제외 300만원~400만원 선이었습니다.
    투어비를 제외한 음식들은 3명이 먹는 끼니마다 대략 5~10만원 사이였고 숙소는 10만원 선에서 결정했습니다.

    여행국가: 스페인
    여행일: 11일


    #인천국제공항

    인천국제공항 더 알아보기

    #바르셀로나 엘프라트 공항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첫 모습은 이국적 공항의 느낌이 아니라 지저분함 이었다. 우리가 출발한 인천 공항은 물론이고 예전에 갔었던 터키의 공항 그리고 약 2시간 전에 있었던 샤를드골 공항과 달리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은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수화물 tag과 쓰레기들로 가득했다. 바닥을 가득 매운 종이와 비닐들은 나의 발목을 잡아끌었고 바닥의 알록달록함은 내 어지러움을 빙글빙글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어지러움 속에 맞이하게 된 유럽으로의 입국심사는 복잡하고 철저할 거라고 들었던 것과 다르게 쉽고 빨랐다. 얼굴을 보는 듯 안보는 듯 하며 도장을 쾅하고 찍은 게 다였다. 가볍게 허가를 획득하고 컨베이어 벨트에 천천히 배달되어오는 수화물을 기다렸다. 알록달록한 내 가방과 엄마의 캐리어를 찾으며 본격적인 스페인 여행의 첫발을 디뎠다. 짐을 찾고 입구를 나와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한국 국적인 동생과 나의 휴대전화를 스페인 국적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철저한 준비와 조사를 바탕으로 여행을 이끌어간 동생의 실력이 재대로 발휘되며 복잡한 공항 속에서 u-sim구입처를 한 번에 찾아갔다. 스페인 u-sim구입처로 느긋하게 걸어가면서 생각지도 못한 풍경을 마주했다. 인천공항 검색대처럼 길고긴 줄을 선 사람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대부분의 한국 여행객들을 그곳에서 만난 것 같이 느껴졌었다. 꽤 긴 줄을 기다려 얼마간의 데이터와 통화가 포함된 u-sim을 15유로를 주고 구입했다. 여행 내내 1유로를 1500원 정도로 생각하니 15유로는 22,500원으로 생각하면 됐고 그만큼 데이터를 소중하게 아꼈고 결국 절반밖에 사용하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유창한 동생의 영어로 u-sim은 쉽게 구입했지만 그냥 공항을 떠났으면 마주할 고난은 통신사를 다닌 엄마의 통찰로 막을 수 있었다. sim카드는 있었지만 휴대전화에 장착하기 위해 필요한 핀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점원은 손수 친절하게 u-sim을 바꿔주었고 우리의 전화는 스페인 국적을 취득 할 수 있었다. 동생이 점원에게 데이터며 여러 가지 설명을 듣는 것을 옆에서 대충 흘려듣고 나서야 공항을 나설 수 있었다. 어둑어둑한 시간 한국에서 공항으로 왔던 것처럼 바르셀로나에서도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엄마의 캐리어와 나의 쓸데없이 큰 배낭을 싣고 버스는 우리의 첫 아파트가 있는 카탈루냐 광장으로 향했다. 당연히 이국적인 풍경을 열심히 고개를 돌려가며 가다가 만난 빛나는 분수대는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첫 관광지였다. 어두운 하늘과 반짝이는 분수의 아름다움은 바르셀로나의 첫 인상을 아름답게 해주기 충분했다. 그렇게 시내를 거쳐 목적지인 카탈루냐 광장에 우리는 안전하게 내렸다.
    바르셀로나 엘프라트 공항 더 알아보기


    #가우디 투어

    자전거나라 바르셀로나 가우디 투어
    구엘공원-까사밀라-까사바뜨요-몬주익언덕-중식-사그라다파밀리아
    자연 속 쉼터, 구엘 공원
    버스가 드디어 멈추고 첫 관광지인 구엘 공원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어가며 가이드는 고급 맨션지구로 만든 구엘 공원이었지만 정작 인기가 없어 단 3가구 밖에 분양되지 못했다는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정작 그런 이야기는 공원의 모습에 눈을 빼앗긴 나의 귀를 스쳐지나가기만 했었다. 그 이야기 이후에 시작된 구엘 공원 속에 담긴 의미들과 활용들에 대한 설명은 눈으로 빼앗겼던 나의 집중력을 다시 귀로 돌리기에 충분했다. 가이드는 먼저 공원이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 기둥과 기둥 위에 심어져 있는 용설란이 공원 전체를 야자수 나무 숲처럼 보여 진다고 이야기했다. 과연 둥근 기둥의 모습과 그 위에 심겨진 용설란의 이파리는 야자수 나무의 잎처럼 활짝 펼쳐져 멀리서 본다면 야자수 나무로 착각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미적 표현과 더불어 용설란의 특성을 이용한 부분의 설명은 나를 가우디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용설란의 뿌리는 오직 곧게 아래로 자라며 그 뿌리가 기둥 속의 흙을 단단히 잡아준다고 했다. 그렇게 자란 뿌리가 흙과 돌로 된 기둥을 더욱 단단히 해주었고 과거 큰 태풍이 몰아쳤지만 구엘 공원은 무너지지 않고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냈다는 것이다. 기둥과 풀의 외형을 통해 공원의 조경만을 신경 쓴 것이 아니라 식물이 어떻게 자라며 그 특성을 통해 안정감까지 보장하려던 가우디의 생각은 내게 머리를 탁 치는 충격을 주었다. 그런 충격이 머리를 울리는 가운데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구엘 공원 속으로 입장했다. 가이드를 따라 천천히 공원의 굽은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구엘 공원은 점점 더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높은 지대와 걸리는 것 없는 조망은 바르셀로나 시내를 한눈에 담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바르셀로나 시를 넘어 보이는 바다는 구름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반짝반짝하게 반사하여 보석을 깔아둔 것만 같았다.
    짧은 포토타임을 끝으로 가이드는 우리가 서있는 광장의 발밑으로 이끌어 갔다. 계단 오른편으로 뻗은 마치 동굴과 같은 산책로는 가우디가 사랑했던 지중해의 파도를 닮아있었다. 마침 가이드도 그런 파도의 모양을 따라 만든 산책로로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파도의 동굴을 옆으로 내려온 광장의 아래를 받치는 공간은 굵고 듬직한 기둥이 받들고 있는 공연장 이었고 그 공연장에서 내가 구엘 공원을 그토록 좋아하게 된 이유를 만났다. 작고 동그란 돔을 배열하여 꾸민 천장은 마치 구름이 그러하듯 우리 머리 위를 채웠다. 그 구름들 사이사이 내려와 바닥으로 뻗은 기둥들은 장대비가 하늘을 지탱하듯 광장의 천장을 받치고 있었고 하나하나의 섬세함은 자연을 그곳에 담아 둔 것만 같았다. 그런 섬세함을 주변에 보이는 흔한 물건들을 통해 아름답게 꾸며놓았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접시며 도자기들의 파편을 모자이크처럼 천장의 장식에 사용되었고 태양마저 인형과 색깔이 들어간 파편들로 완성되어 있었다.
    높은 고지대에 위치한 구엘 공원의 지형은 식수와 생활용수의 공급이 힘들었고 건축 당시에도 그런 비판은 가우디에 가해지고 있었다. 그리스의 긴 수로를 이용하거나 지하수를 파는 해결책 대신 가우디는 그의 천재성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고 그런 천재성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빠져들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비가 오면 넓은 상부의 전망대 광장의 바닥을 집수대로 이용해 빗물을 모으고 그것을 기둥의 속을 채운 모래와 자갈들을 통해 정수해서 사용한다는 생각은 지금의 정수기처럼 광장 전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런 구조적 정수 시스템과 더해 구름과 장대비를 생각나게 하는 기둥의 모습은 자연 속에서 순환하는 물의 흐름을 이 작은 공원 안에 그대로 담아둔 것만 같은 기분마저 느끼게 했다. 범인인 내가 감히 상상하지 못할 만큼의 천재성은 숭배자처럼 나를 만들어버렸다. 구름사이로 내려쬐는 빛은 이른 시간의 추위를 녹여주었고 자유시간이 시작되었다. 후문을 통해 들어왔기에 정문에 있는 재미있는 모양의 두 집과 나뭇잎을 닮은 펜스를 천천히 구경하며 기념품점과 카페를 거쳐 햇볕이 쏟아지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엄마와의 첫 여행, 그리고 그 첫 번째 관광지를 느끼며 따뜻함에 몸을 녹이며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곡선의 향연, 까사 밀라
    버스는 가우디의 다음 작품인 까사 밀라에 도착했다. 당시의 건축법을 어기면서까지 크게 지었던 까사 밀라는 온통 곡선과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있었다. 상아색의 외벽과 바다의 파도와 같은 유연한 선과 해초를 연상시키는 발코니의 펜스들은 과연 가우디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집이란 의미의 까사와 주인의 이름인 밀라의 합인 까사 밀라는 그 원래 이름보다 더 유명한 이름이 또 하나 있었다. 가우디가 까사 밀라를 건축하기 위해 그 공간에 가득 채웠던 돌들과 바위들을 행인들이 보고 붙인 채석장이라는 이름인 라 페드레라(la pedrera), 그 의미를 알게 되면서 더욱 친근한 이름으로 다가왔다.
    아름답고 우아한 이 건물이 미완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머릿속에 물음표를 지을 것이다. 가이드에게서 미완성의 작품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당연하게 내 머릿속은 의문 부호로 가득 찼다. 겉으로 보기에 어느 한 부분 빠진 것도 그렇다고 조화가 안 이루어지는 것도 없는 저 건물이 미완성이라니 황당하고 어색한 말이었다. 가이드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서야 왜 라 페드레라가 미완성인지 알게 되었다. 가우디가 작품을 만들 던 그 시기 스페인의 사회상이 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미완성으로 남게 했다.
    기괴한 교회의 타락이 드러나는 순간 바르셀로나는 그 어떤 혼란보다도 더 심각하게 그리고 폭발적으로 들고 일어났다. 거리마다 성직자를 메달아 죽이고 성당과 관련된 건축물이 수난에 빠졌다. 그에 더해 성당의 타락을 덮어주던 귀족과 상인들 또한 성난 군중의 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라 페드레라는 한창 건축되고 있었다. 아름다운 바다의 곡선으로 이루어진 고급 맨션인 라 페드레라는 그 학살의 거리 가운데 차근차근 자신의 모습을 쌓아갔고 드디어 마지막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 마무리이자 가우디의 사회에 대한 바람이 담긴 것은 바로 건물 옥상에서 바르셀로나를 내려 보는 성모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성당과 귀족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하는 시기, 만약 옥상에 성모상이 올라간다면 이미 부유층의 거리에 자리한 라 페드레라가 성난 군중의 목표가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의뢰인인 성모상이 옥상에 올라가지 않기를 바랐고 성모상이 작품의 마침표라고 생각한 가우디의 요구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성모상이 올라가지 못한 라 페드레라는 가우디 스스로가 미완의 작품으로 선언하였다.
    기괴의 아름다움 까사 바뜨요
    수많은 피가 흘렀을 그 거리를 한참 내려오며 다리가 아플 때쯤 우리 앞으로 무엇인가 등장했다. 아픈 다리를 잊을 만큼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까사 바뜨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아니 앞으로도 만나 볼 수 없을 것 같은 기괴한 건축물을 말이다. 까사 밀라와 마찬가지로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그 파격적 외형은 충분히 흥미와 관심을 끌만했다. 정말 사람의 뼈처럼 생긴 발코니의 장식과 해골의 모습이 언 듯 보이는 것 같은 거대한 유리창은 정말 뼈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이드는 건축물의 외관에 표현되어 있는 척추 모양의 장식을 세어보라고 말했다. 척추의 숫자는 겉으로는 모자라 보이지만 내부의 장식까지 포함하면 정확히 척추의 개수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또한 까사 바뜨요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다. 하나는 바르셀로나의 용에 대한 전설이었다. 용이 존재했던 시대에 바르셀로나를 지배하던 용에게 귀족의 딸이 잡혀갔고 용을 잡기위해 용맹한 기사가 달려가 치열한 싸움 끝에 용을 무찔렀다는 것이다. 곁다리로 우리가 흔히 들었던 기사와 여주인공의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전설이 까사 바뜨요의 지붕을 장식하고 있었다. 물론 이야기를 처음 듣고는 용과 기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이드가 손을 뻗어 우리의 눈을 이끌자 전설 속의 용은 몸을 일으켜 우리를 노려보았다. 지붕가득 채워진 비늘이 용이 여기 있음을 드러냈고 몸을 일으키던 용을 다시금 전설로 돌려보낸 기사의 창이 그곳에 있었다. 새하얀 손잡이가 달린 창은 용의 몸을 관통해 용의 비행을 멈추었고 그 끝의 피는 가사 바뜨요의 지붕을 전설 속의 한 장면으로 만들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바다였다. 구엘 공원에서 눈부시게 햇빛을 반사시키던 그 바다가 까사 바뜨요에 있었다. 겉으로 보면 뼈와 해골 같은 기괴한 느낌의 건물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쉽게 지나치기 힘든 모습이 보인다. 테라스를 장식하는 조형들의 모습은 해초를 닮아있었고 가이드의 말로는 내부는 푸른 바다를 그대로 떠온 것 같다고 말했다.
    몬주익
    바쁜 투어 일정에 떠밀려 우리는 버스에 얹혀 고지로, 고지로 향했다. 점점 오를수록 멀리 대성당과 완벽하게 계획된 도시의 모습이 점점 펼쳐지듯 눈으로 들어왔다. 말 그래도 눈 속에 바르셀로나라는 도시가 펼쳐졌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끝없이 올라 하늘에 맞닿을 때 쯤 버스는 멈췄다. 언덕이라는 이름이 붙기에 너무나 높고 가파른 몬주익의 전망대는 황영조의 역주로서 한국인에게 다가왔다. 물론 92년 올림픽 당시 7살이던 나의 기억에 황영조의 마라톤은 마지막 골인 밖에 남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찌됐건 손기정 옹 이후 첫 마라톤 금메달의 역사는 몬주익 언덕을 올라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들어가던 그 장면은 잊기 힘든 명장면이다. 그런 역사적 기억을 함께 몬주익은 바르셀로나라는 도시를 새롭게 생각하는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길 잃기 쉬운 도시라는 인터넷 유머 수준의 내 지식에 가이드는 찬물을 확 끼얹어 주었다. 스페인 제일의 관광 도시로 자리매김 하기 전 바르셀로나는 지중해를 매개로한 항구공업도시였다고 한다. 그런데 몬주익을 오르기 전 지나온 도시는 전혀 공업과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느긋한 사람들의 발걸음과 공장은 전혀 보이지 않는 길거리의 풍경 심지어 몬주익에 올라서조차 보이지 않는 굴뚝은 공업도시라는 말을 믿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로는 정확한 사각형으로 구획 지워 졌고 전망대인 이곳에 올라서조차 공장지대라는 느낌이 드는 장소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의문에 쌓인 눈으로 도시를 돌아보던 중 언덕 뒤로 무엇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이 공업도시인 바르셀로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항구와 산업지대였다. 관광도시로 새로이 계획하며 몬주익의 뒤로 모든 산업지대를 옮겨놓았던 것이었다. 예술과 도시 그리고 관광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생각이 고스란히 도시계획에 반영되어 지금의 바르셀로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니 괜스레 부러워졌다. 우리들의 도시계획은 그저 집값을 올리고 편의시설을 늘리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기에 급급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본 바르셀로나는 공항에서의 혼란이 무색하듯 반듯하고 질서정연했다. 멀리 바다가 보이고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진 블록들을 따라 눈을 이동하다 문 듯 멈춘 높다란 크레인은 바르셀로나에 온 이유를 상기시켰다.
    첫 경험 in 스페인
    정신없던 투어를 지나 여유를 가지자 슬슬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국과 8시간의 시차를 가진 바르셀로나였지만 딱 현지시간 12시가 되자 이상하게도 배고픔이 배를 두드렸다. 관광지의 설명과 이동을 책임지는 현지 투어는 식사만큼은 자유로웠다. 버스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던 중 아침부터 우려했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빗줄기는 점심은 물론 앞으로의 관광도 걱정할 만큼 무서웠다. 그러나 엄마의 30년 고생에 대한 위로인 듯 비는 어느새 그쳤고 오히려 쾌청한 하늘과 상쾌한 공기를 안겨다주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도착한 항구는 포트벨 만큼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간단한 식사부터 풀코스의 스페인요리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곳에서 동생의 바르셀로나 경험치는 행복한 식도락을 우리에게 주었다. 지중해와 접한 특성상 해산물은 풍부했고 자연히 해산물 요리는 풍부하고 맛있었다. 동생의 추천에 따라 해산물 찜과 스페인 전통요리인 빠에야를 허겁지겁 주문하고 나니 가게 안에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이 눈에 띄었다. 참새만큼 작은 새들이 분주히 테이블과 의자사이를 날아다녔지만 누구도 쫓아내거나 귀찮게 여지기 않았다. 옆 테이블의 음식들이 들어오는 것을 호기심 넘치게 보고 이야기하다보니 우리 차례가 왔고 등장한 요리는 대식가인 나와 동생도 쉽게 엄두내지 못하게 수북했고 그러면서도 먹고 싶을 만큼 탐스러웠다. 가득한 해산물과 거대한 빠에야 냄비를 가득 채운 음식이었지만 허기진 우리는 끝없이 먹었다. 레몬을 살짝 뿌려 상큼한 해물과 게장에 밥을 볶은 것만 같던 빠에야의 맛은 스페인의 음식과 나를 사랑에 빠뜨렸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었지만 또 먹고 싶을 만큼 유혹적인 맛이었다.
    미완성의 성당
    사진 촬영이 끝나고 드디어 가이드의 작품 설명이 시작되었다. 가우디의 건축물에 도착할 때마다 펼쳐진 가이드의 설명과 이야기는 자유여행을 통해 지나치기만 할 작품들을 그 속의 의미까지 알 수 있는 도우미였지만 그 많은 양의 설명은 다리를 무겁게 하는 함정이기도 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그런 함정은 절정을 달렸다. 체감시간 한 시간이 넘는 성당의 설명은 탄생의 파사드로부터 시작해서 생명의 파사드인 성당의 정면을 지나쳐 반대편인 시련의 파사드를 정점으로 다시 원래의 탄생의 파사드로 돌아왔다. 물론 생명의 파사드는 한창 건설되는 중으로 높은 벽들에 둘러쌓여 볼 수는 없었지만 탄생과 시련의 파사드는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신의 창조물을 경외해 그 높이를 넘지 않게 설계한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첨탑디자인은 170m나 172m로 조금씩 다르지만 몬주익에 딱 1m가 모자란 높이였다. 성당의 건축을 맡아 인생의 말년 모든 것을 던진 가우디의 신앙심이 그 높이에서부터 읽혀질 만큼 나에게 강렬했다. 파사드의 부분마다 성서의 이야기를 담은 조각은 나의 눈을 홀렸고 그 조각의 주인공들이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조각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만들었다. 조각을 만들며 주변의 사람들을 직접 석고로 본을 떴고 어린아이들의 조각은 죽은 아이의 시체를 이용했다는 말은 그의 치밀함과 노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오랜 시간 견뎌온 파사드는 그 세월이 고스란히 남아 때 묻고 때론 부서져 그곳을 지키고 있다.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가우디의 파사드는 손상된 부분의 수리마저 쉽게 할 수 없었다. 우리라면 파손된 부분을 똑같은 모습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유산으로 등록된 수리는 그 수리의 흔적이 남도록 해야 했다. 완성된 예술작품으로서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기에 작가의 순수한 의도와 손길을 보존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인지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몇 부분의 수리흔적을 보고 난 후 수비라츠의 고난의 파사드를 마주하게 되었다. 앞선 탄생의 파사드가 섬세하고 치밀한 조각과 구도를 통해 완성되어 있다면 고난의 파사드는 정말 심플하고 모던한 느낌의 작품들로 구성되어있었다. 잘못 지나치면 다른 성당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느껴질 만큼 양쪽의 파사드는 다른 분위기와 첫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건설 당시에도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의문과 비난이 수비라츠에게 쏟아졌지만 자신의 신념을 밀어붙여 이 고난의 파사드는 완성되었다. 그리고 수비라츠가 입을 열자 그 많던 비난은 사라졌다고 했다. 현대의 가우디라면 분명 자신의 작품을 인정해줬다는 의미의 말을 했다고 들으니 과연 때론 기괴한 가우디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도전과 치열함이 그 속에 담겨있었다. 투박한 듯 보이지만 있어야 할 이야기들은 충실히 담겨있었고 보면 볼수록 더 많은 이야기들이 밖으로 솟아나오는 것 같았다. 가운데 못 박힌 예수는 어느 방향으로 보아도 우리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고 요소요소 빠짐없는 연출들은 단순하기에 모자란 것 같았던 파사드를 신화의 세계를 품고 있는 훌륭한 한편의 성서였다. 그리고 숨은 포인트로 그 속에 담긴 가우디의 모습은 이 고난의 파사드를 만들며 가우디를 생각했을 수비라츠의 심정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안타까운 사고와 무관심으로 인해 위대한 작품의 일부분밖에 만들지 못했던 가우디의 안타까움과 그 정신을 이어받은 수비라츠의 마음이 어쩌면 단순한 일개 건축가로서 가우디를 성서 속 성인의 모습처럼 이 파사드 속에 살아 숨 쉬게 해준 것 같았다. 그렇게 외부의 모든 부분 부분을 하나씩 설명 듣고 감상하고 다시금 돌아온 탄생의 파사드 앞에서 자유로이 성당 안을 들어가 관람하는 마지막 일정을 시작했다.
    매표소에서 검표를 하고 탄생의 파사드를 통해 들어간 성당의 모습은 웅장함이나 화려함을 압도하는 아름다움이 쏟아졌다. 2010년 교황의 미사를 준비하기 위해 급조한 성당의 내부라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과연 급조라는 말이 어울릴지 의문이 들만큼 성스럽고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오히려 비어있는 공간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움직이고 감상하며 감탄하기 충분한 여유를 주었다.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햇빛을 조명삼아 나뭇가지를 그대로 세워둔 것만 같은 기둥들이 아름다운 숲속을 연출하고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색감도 초록빛의 한쪽과 붉은 빛의 한쪽이 마주보며 해가 뜰 때와 질 때 성당 안은 여름의 숲과 가을의 숲을 매일같이 보여줄 것만 같았다. 비록 해가 숨은 흐린 날씨였기에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는 없었지만 은은히 비추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은 아침 안개속의 숲인 것처럼 고요하고 차분한 기분이 들게 해주었다. 엄마와 동생이 잠시 휴식을 취한 틈에 나는 더욱 도전적이게 성당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십자가 모양으로 뻗어있는 성당의 내부를 수 십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숨겨진 지하 예배당의 모습을 훔쳐보고 또 기둥 하나하나의 질감과 모양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신나는 탐구생활을 즐겼다.
    그렇게 내부의 사진을 찍고 난 후 도로 건너서 보아야 했던 고난의 파사드를 가까운 곳에서 보기위해 성당의 밖으로 향했다. 멀리서 설명만 듣고 지나는 차들과 사람들 탓에 자세히 볼 수 없었던 파사드를 가까이서 보니 더욱 섬세하고 실감나는 감상이 이뤄졌다. 십자가를 진 예수를 배경으로 엄마의 자유로운 모습을 찍고 다시금 설명들을 이야기하면서 점점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매력에 젖어 들어갔다. 한참을 엄마와 둘이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시간을 보내고 나니 자꾸만 모자란 시간에 아쉽고 마음이 급해졌다. 밤 일정이 예약되어 가이드 버스를 꼭 타야했기 때문이었다. 부족하지만 성당 전체를 둘러본 후 지하에 있는 가우디 박물관으로 향했다. 바르셀로나 곳곳에 설치된 가우디에 관한 박물관들이었지만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박물관은 그 상징성에 있어서 조금 더 깊은 감명을 주었다. 가우디가 건축을 한 여러 건축물들의 모델들과 부분부분 놓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들은 지겨운 곳이나 공부를 해야 하는 곳이라는 박물관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꾸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손목을 바라보며 시간에 쫓기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빠르게 관람을 하고 동생과 기념품 상점에서 합류하여 성당 밖으로 나왔다.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 너무나 아쉬워 자꾸만 주저했었다. 이 발걸음을 내딛으면 다시 돌아가 성당의 내부를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내 발목을 자꾸만 잡아끌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니 이미 관람을 끝낸 사람들이 가이드에게 궁금한 것을 물으며 모여 있었고 자연스럽게 우리도 주변으로 이끌려갔다. 여기서 작은 해프닝은 미처 엄마를 파악하지 못한 가이드가 팔을 내리다 엄마의 얼굴과 부딪혔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이 마무리 되었지만 스페인 여행의 초반에 마주한 큰 위험이 아니었나 싶었다. 가슴을 쓸어내릴 상황을 지나자 곧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닥쳐오고 있었다. 말 그대로 그 때의 나에게 시간은 너무나 무서운 추격자였고 장난감을 눈앞에 둔 아이처럼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진하게 남아있었다. 지난번 터키 여행에서처럼 아쉬움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이유가 되어줄 것이라는 자기위안을 애써 대뇌었지만 기약 없는 그 언젠가가 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애써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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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람블라 거리, 람블라스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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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알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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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딕 지구

    산 필립네리, 향수와 총탄
    작은 돌들로 꾸며진 바닥을 밟으며 들어선 굽이진 골목의 옛 집들과 은은하게 켜진 가로등은 단숨에 현대의 유럽에서 중세의 유럽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약간의 안개는 가로등의 빛을 신비하게 산란시켜주었고 그 풍경 속을 만끽하며 우리는 걸어갔다. 한참 골목을 따라 걷다 꺾어지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새로운 공간이 우리를 반겼다. 산 필립네리 광장이 바로 그곳이었다. 작은 우물과 직사각형의 광장 그리고 육중한 문은 참으로 조용히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인지 부서진 벽은 왠지 묘한 기분이 떠올랐다 사라지게 했다. 광장의 한 쪽 하얀 식탁보를 덮은 테이블에 가족이 식사를 하고 있었고 그 위로 조용히 내린 조명은 로맨틱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모두들 광장을 둘러보고 분위기를 느끼고 있는 중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낮 투어에서 설명을 빠뜨려 타파스를 밥으로 먹었던 경험은 내 온 신경을 가이드의 입으로 집중시켰다. 향수라는 꽤나 유명했던 영화의 배경으로 산 필립네리와 고딕지구가 이용되었다고 말하며 몇몇 공간이 영화에서 어떻게 등장하는 지를 알려주며 설명을 이어갔다. 과연 밤의 분위기가 영화 속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저런 설명이 끝나고 잠시 숨을 돌린 후 한쪽 벽에 남아 있는 여러 흔적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아까의 묘한 기분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위화감처럼 느꼈던 기분은 벽면에 있는 많은 흔적들이 마치 노근리나 다른 몇몇의 장소들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는데 가이드의 말을 들으니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 흔적은 총탄이 박혔던 흔적이었고 더군다나 군인들에 의해 쏟아진 민간인에 대한 학살의 기억이자 역사였던 것이다. 다시 생각해본 광장의 분위기는 조용한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품고 굳게 다문 입처럼 무거운 것이었다. 군부 쿠데타와 독재를 지속한 당시 스페인의 분위기에서 일어났던 카탈루냐 지방의 분리 독립운동은 여기 남은 총탄의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압재는 마치 한국의 현대사를 그대로 복사해둔 것 같았다. 거짓으로 주민들을 모으고 총탄으로 그들을 학살하던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광주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만큼 닮은 슬픈 역사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나간 역사의 슬픔을 안고 있는 광장이란 것을 알게 되면서 일행들 모두 차분하고 조용한 걸음으로 다음 장소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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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광장

    왕의 광장, 왕보다 위대한 콜럼버스
    광장을 나와 향한 곳은 스페인을 여행한 9일 동안 수없이 들었던 이사벨 여왕의 거주지이자 위대한 탐험가로 알려진 콜럼버스의 역사적 귀환지인 왕의 광장이었다. 이사벨 여왕은 이슬람 교리를 기본으로 하던 옛 스페인의 땅을 통일하고 가톨릭 국가인 현재의 스페인의 기틀을 닦았고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절대적 지지자였다. 위대한 탐험가로 많이들 알고 있지만 반대로 최악의 학살자로서의 모습마저 함께 가진 탐험가 콜럼버스, 어느 위대한 왕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그 탐험가가 귀환했던 그곳이 바로 이 왕의 광장이었다. 무한한 지지를 보낸 여왕이 거주하며 항구에 배를 내리자마자 마차를 타고 이 궁전 앞 광장으로 도달하는 콜럼버스의 모습을 상상하자 이 공간이 조금은 더 특별해진 느낌이 들었다. 늦은 밤 고요한 광장의 분위기는 아까 산 필립네리의 조용함과 다른 조용함이었다. 이미 오래전 새로운 땅을 찾으러 가는 시발점이자 그 탐험의 결착을 지켜본 이 광장이 또 다른 시작을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나의 위대한 시작을 반겨주는 느낌은 나 혼자만의 느낌이겠지만 말이다. 늦은 밤은 궁전의 내부나 구석구석을 구경할 수 없는 아쉬움을 주었지만 그 역사적 분위기와 느낌은 충분히 이 왕의 광장에 온 보람을 느끼게 했다. 더욱이 은은한 조명 아래 남긴 우리 세모자의 사진은 언제나 꺼내 봐도 기분 좋은 추억이 되었다.
    광장을 조용히 나와 다시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걸으며 가이드의 소매치기를 조심하란 경고는 조금의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괜히 스쳐지나가는 사람을 조심하고 뒤를 신경 쓰면서 걸은 탓인지 어두운 거리가 더욱 어둡고 위협적이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귓가를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운 선율과 흥겨운 리듬이 점점 가까워 져왔고 그만큼 나의 걱정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있었다. 드디어 거리의 음악가와 만난 순간 소매치기나 길을 잃을 걱정 따위는 내 머리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음악의 흥겨움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긴장을 풀자 다시금 골목의 분위기와 풍경이 눈에 보이며 다시 중세의 공기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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